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칼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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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씨받이>는 임권택의 여든네 번째 영화이다. 여기에 이 르기까지, 그리고 이른 다음에도 임권택은 조선 시대로 계속 되돌아 들어가고 그런 다음 나오기를 반복했다. 우 리들에게 조선시대는 끝나긴 했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. 조선은 우리 곁에 머물면서, 때로는 우리 위에서 내리누 르고, 그리고 종종 우리 아래를 떠받치고 있다. 무엇을 물 려받았고, 무엇을 숨겨놓은 것일까. 마치 우리를 때로는 잡아끌기도 하고, 또 어느 순간에는 마치 그때가 지금인 것처럼 우리 눈앞에서 태연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만 같다. 우리 안의 그들. 근대 안의 조선시대. 한국영화는 계속해서 조선시대를 건드렸다. 누군가는 조선시대에서 민족을 찾 았고, 누군가는 영웅을 찾았으며, 누군가는 민중을 찾았 고, 누군가는 왕을 찾았고, 누군가는 색(色)을 찾았으며, 누군가는 전쟁을 찾았으며 (... ) 그리고, 임권택은 유교를 찍었다.

 

조선시대 양반 가문 종갓집 종손 신상규와 그 부인은 슬 하에 자식이 없자 친족들이 모여 논의 끝에 씨받이를 들 이기로 한다. 사람들의 눈을 피해 씨받이 마을에서 데려 온 나이 어린 옥녀를 아흔아홉 칸 고택의 별채에 숨겨놓고 길일에 그 둘을 합궁시킨다.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던 옥녀는 점점 신상규에게 마음이 열리고, 양반은 씨받이 에게 끌린다. 하지만 임신이 되자 둘은 다시 각자의 자 리로 돌아가고, 출산하자마자 옥녀는 쫓겨나듯 아이의 얼 굴도 보지 못하고 한밤중에 떠난다. 일 년 뒤에 아이가 보고 싶어 찾아온 옥녀는 이 집 근처에서 목을 맨다.

 

아마도 이 이야기가 익숙할 것이다. 이 서사는 한국영화 에서 수없이 만들어진 양반과 '쌍것' 사이의 넘나들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이다. 하지만 임권택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. 는 한쪽에서 하나의 의식처럼 합궁이 어떤 감정도 지니지 않은 채 진행되면서 다른 한쪽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떠받드는 제사 라는 의례절차가 지극정성을 다해 진행된다. 이 영화의 무서운 장면. 서로에게 마음이 이끌린 양반 신상규와 씨 받이 옥녀는 합궁하는 길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안 정원 구석에서 몰래 만난다. 어둠의 그림 자가 드리운 한밤중. 그때 큰 마루에서는 가문의 어른들이 모여 문중 제례를 논하면서 죽은 조상을 모시는 도리에 대해서 조용하지만 엄격하고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이야 기를 이어간다. 그때 임권택은 어두운 정원에서 그 둘을 크레인을 이용해서 하나의 세계로 담아내어 병풍처럼 펼쳐 보인다. 한쪽에서는 조선시대에도 법과 도리 바깥에서 사 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은밀하게 보여주면서 다른 한쪽 에서는 어떻게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지배하고 있는지가 펼쳐진다. 두 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. 하나의 세계, 서로 공존하는 삼강오륜의 질서, 여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. 그건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지켜진다. 오직 법과 명령만이 거기 있을 뿐이다.

 

임권택은 여기서 단 한 순간도 어떤 감상이나 동정심에 물들지 않는다. 그저 그걸 지켜볼 뿐이다. 그러면서 그 둘이 사실은 하나이며, 그렇게 죽음과 삶이 서로 연결된 한국인의 내세관을 떠받치는 유교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를 바라본다. 양반들의 일상생활, 그 생활의 디 테일들, 그 세계가 법칙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. 어떤 법 칙? 유교의 법칙, 가문의 도리, 자식의 의무, 아내의 법, 넘을 수 없는 양반과 '쌍것'의 선, 마치 무덤과도 같은 고색 창연하고 우아한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의례에는 어떤 양보도 없고, 어떤 타협도 없다. 한 번 더 말할 수밖에 없다. 해야 하기 때문에 그걸 행한다. 의무와 예속의 세계, 잔인 함은 기품이 있으며, 무자비한 과정은 우아하고, 도리의 위계질서는 엄격하게 지켜진다. 그런데 사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. 동방예의지국, 그 고요한 아침의 나라, 는 몸서리칠 만큼 잔인하고 아름답게 찍힌 '한국' 영 화이다. 같은 말을 반복하겠다. 한국은 몸서리칠 만큼 잔 인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. 그걸 에서 보게 될 것이다.

 

 

 

정성일 영화평론가, 영화감독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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